아레오파고스(의회)는 정치적 평의회가 아니라 고명한 살인사건 재판소
아레오파고스는 아르콘(장관)에 대한 탄핵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작위 추첨제 자체가 권력간 유착 관행을 막는 민주적 장치
아레오파고스 의회와 500인 의회는 최종 결정권을 가진 민회를 능가하지 못했다
도편추방도 민회에서 한 것
한겨레신문(2024.5.23. 고명섭의 카이로스)에 “‘아레오파고스 권력 농단’이 부른 아테네 사법 민주화”란 글이 실렸다. 아레오파고스는 고대 아테네에 있었던 의회의 일종이다. 대개 아테네 민주정치를 말할 때는 민회와 500인 의회를 들고, 아레오파고스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만큼 아레오파고스 의회는 우리에게 가려져 있었던 것인데, 고명섭이 이것을 다루었다. 또 그런 만큼 이 의회를 소개하는 데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이고, 실로 이에 대한 그의 이해와 서술이 사실과 다른 점이 있어 시정을 요한다.
고명섭은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점은 배심원제도라고 전제하고, 이것은 소수 특권층이 서로서로 봐주는 아레오파고스(의회) 중심의 담합 관행을 무너뜨리고, 시민주권을 사법 영역 전반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레오파고스 의회가 소수 특권층의 담합 관행이 이루어지는 기관인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팩트)에 맞지 않다. 특히 아레오파고스 의회가 가진 사법 기능은 민주정치가 발달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 의회는 민주정치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동조하는 기관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참조, 최자영, 고대 아테네 정치제도사, 아레오파고스와 민주정치, 신서원, 1995. 그리스 이와니나 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글번역본, 1995년 문화체육관광부 역사부문 우수도서)
무엇보다 아레오파고스 의회의 기능 및 위상 관련하여 고명섭이 범한 오류는, 첫째, 아레오파고스 의회를 ‘평의회’로 성격 규정하고, “소크라테스 시대 이전에 아테네에서 중대 형사재판을 담당한 곳은 아레오파고스 평의회였고, 이 평의회에서 현직 아르콘의 탄핵을 비롯한 중대 범죄를 재판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전은 물론 그 후에도 아레오파고스는 중대 형사재판을 다룬 적이 없고, 현직 아르콘(장관)도 탄핵한 적이 없다. 아레오파고스는 고래로부터 후대까지 살인사건 재판소로 알려져 있었을 뿐이다.
고명섭은 “아레오파고스 재판의 공정성이 무너지는 데 민중이 분노해서 사법제도의 혁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가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가 주도한 사법개혁이다. 이 개혁으로 시민이 직접 재판을 진행하는 배심원제도가 등장했다”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아레오파고스는 민중이 분노할 만큼의 공정성을 무너뜨릴 재판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고명섭의 이 같은 진술은 실체가 없다.
둘째, 고명섭은 고대 아테네에 있었던 추첨제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아레오파고스 의회를 소수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로 잘못 파악했다. 상식으로 주지하듯이,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중심은 민회에 있었고, 그 어떤 기구도 민회를 능가하는 것은 없었다.
고명섭은, “아레오파고스 의회는 전직 아르콘들로 구성된 일종의 원로원으로, 해마다 아르콘을 10명씩 추첨으로 뽑았고, 임기가 끝난 아르콘들은 자동으로 아레오파고스 의원이 됐다. 그런데 의원들 다수가 현직 아르콘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러다 보니 사적인 이해관계에 휘둘려 아르콘의 비리를 덮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고명섭은 추첨제도 자체가 갖는 민주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추첨으로 뽑히고 해마다 바뀌는 임기 1년의 아르콘들은 서로 사적 이해관계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사적 이해관계에 휘둘려 아르콘의 비리를 덮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 고명섭은 근원적으로 아테네 민주정치의 작동 기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테네 민주정치의 추첨제는 철저하게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연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재임도 원하는 이가 모두 추첨을 통해 아르콘직을 거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민중이 선출하는 것도 아니고, 무작위 추첨으로 뽑은 제도에서는 선동을 통한 선거운동도 불가능하다.
셋째, 고명섭은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을 사법의 민주화로 파악함으로써, 민회의 위상을 결과적으로 폄훼했다. 민회의 결정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그 외 어떤 의회체(아레오파고스, 500인 의회[불레])도 민회를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근현대 국가와 같은 상근 관료에 의한 정부가 없었다. 그래서 시민 민중의 모임인 민회가 최고의 결정기구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사실 상식에 속한다. 그 외 의회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이 아레오파고스 의회와 500인 의회이다. 이 중 그 어느 것도 민회의 권위를 능가할 수가 없었다.
아레오파고스 의회는 오랜 기원을 가진 것으로서, 정치적 기능이 아니라 각종 살인사건을 재판하는 기구였다. 아레오파고스는, 고명섭이 이해한 바와 반대로, 악법을 시행하거나 소수 특권층이 서로서로 봐주는 담합 관행의 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부터 훗날에 이르기까지 고명한 살인사건 재판소로서, 지중해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아테네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살인사건 관련하여 현명한 판결을 받기 위해 자진하여 아레오파고스를 찾아 왔다.
아레오파고스는 정치권력 기구가 아니라 애초에 사회적 합의에 의해 그 권위가 인정되었다. 살인을 또 다른 살인으로 보복하는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서, 부득이 관습적으로 존재하는 기구였다.
고명섭은 아레오파고스를 평의회(評議會)로 이해했으나, 아레오파고스는 평의회로 번역하기 어렵다. 평의회의 사전적 의미를 “의견을 서로 교환하여 평가하거나 심의하거나 의논하기 위한 기구”라고 한다면, 아레오파고스는 통상의 평의회가 아니었고, 예부터 후대까지 그 주요 기능은 각종 살인사건을 재판하는 재판소였기 때문이다.
살인사건 재판소로서의 아레오파고스가 한때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원전 5세기 전반 무렵 잠시간뿐이었다.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인이 그리스를 쳐들어왔을 때, 아레오파고스 의원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시의 저항을 도왔기 때문에, 그 공로로 아테네 민회로부터 정치적 의회로서의 권위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정치적 영향력은 반세기를 넘기지 못했고, 에피알테스의 개혁에 의해 박탈당했던 것으로 전한다.
500인 의회도 근현대 국회(의회)와 달리 민의를 대의하는 의회체가 아니었다. 500인 의회는 결정권이 없었고, 예비 안건을 심사하여 민회로 넘기는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다. 그 외 민회에서 결정되는 사안을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일을 맡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500인 의회의 업무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의회(500인: 우리 300인 국회에 해당)가 처리하는 사안들은 이와 같았다. 또한 신전수리반원 10명을 추첨한다. 이들은 수납관들로부터 30므나를 받아서 신전의 가장 필요한 부분을 보수한다. 경찰도 10명이 있는데, 이들 중 5명은 페이라이에우스에서, 5명은 도시(아테네 도심)에서 근무한다. 의원들은 또 피리 부는 여자들, 하프 켜는 여자들, 현금 타는 여자들을 감독하여 2드라크메보다 더 많이 보수를 받지 못하도록 한다. 여러 사람이 한 여자를 원할 때는 추첨을 하여 뽑힌 사람이 고용한다. 분뇨취급자는 아무도 성벽에서 10스타디온(약 1.8km) 이내에 분뇨를 쌓지 않도록 규제한다. 또 가옥이 도로를 잠식하거나 발코니가 길 위에 돌출하거나, 차양의 물이 길로 쏟아져 내리거나, 문이 길 쪽으로 열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공공하수인을 시켜 길에서 죽은 사람을 치운다.”(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 국가제도, 50이하, 한글판 번역, 최자영, 최혜영 공역, 고대 아테네 정치사 사료 - 아테네, 스파르타, 테바이 정치제도, 신서원, 2003)
아레오파고스와 500인 의회는 민회의 결정에 따라 그 업무와 지위가 결정되는 곳이었을 뿐, 민회 위에 군림하며 악법을 행사하거나 대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기구가 아니었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중심은 민회가 전권을 행사하는 민중 주도의 정치체제였다.
고명섭이 범한 네 번째 오류는 아테네 사법제도의 변천에 관련하여, 악법의 아레오파고스가 민주적 배심재판제도로 변화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테네 민주정치의 배심재판제도는 아레오파고스의 살인사건 재판 기능을 대치한 것이 아니었다. 민주정치가 개화한 5-4세기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아레오파고스의 살인사건재판 기능은 지속되었고, 아테오파고스의 명성은 지중해 전역에 고명했기 때문이다.
아테네 배심재판소(디카스테리아)는 아테네 자체의 정치적 기능의 확대에 따라 발달한 것일 뿐, 과거의 악법을 지양하고 사법이 민주화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4세기 아테네 재판소는 추첨으로 뽑히는 배심재판관(201명, 301명, 501명, 1001명 등)에 의한 것뿐 아니라, 가해자, 피해자 당사자가 동의하는 재판관들로 구성되는 51명의 ‘에페타이’에 의한 것도 있었다. 고래로부터 ‘헬리아이아’라 불리는 재판소가 기원전 4세기에도 존속했는데, 이것은 ‘재판소(디카스테리아)’의 일종이지만, 그 기원은 이른바 민주정치가 발달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고명섭은 아레오파고스를 두고, “‘민주적’ 배심제가 등장하기 전, 소수 특권층이 서로서로 봐주는 담합 관행의 악법”, “‘악법’을 보려면 배심원제도가 들어서기 전 아레오파고스 평의회로 눈을 돌려야 한다. 배심원제도는 소수 특권층이 서로서로 봐주는 담합 관행을 무너뜨리고 시민주권을 사법 영역 전반으로 확대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점”이라고 했으나, 그렇지 않다.
아테네 사법제도의 민주화란 그 전에 비민주적 재판소를 폐지, 지양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테네 폴리스 정치적 기능의 확대로 인해 그 전에 없던 사법 기능이 확대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악법에서 민주화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번다하지 않았던(apragmonsyne) 폴리스의 사무가 번다한 것(polypragmosyne)으로 변한 것이다. 그 시대적 배경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한적했던 아테네가 헬라스(그리스)의 주요 국가로 부상한 것, 델로스 해상동맹의 맹주로 등장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명섭이 범한 다섯 번째 오류는 소크레테스의 재판 관련(플라톤의 <크리톤> 50b-51c)한 것이다. 고명섭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한편으로, ‘악법’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배심원 재판 절차와 그 절차를 뒷받침하는 아테네 법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법제사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안긴 그 법이 악법이기는커녕 아테네 민주주의가 이룬 커다란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고명섭은 "악법이 아니라”고 할 때 그 ‘법’ 개념을 배심원에 의한 재판 절차’와 그 ‘절차를 뒷받침하는 아테네 법’ 두 가지로 분리한다. 그리고 이것이 “아테네 민주주의가 이룬 카다란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여기서 고명섭의 ‘법’ 개념은 주로 배심원 절차로 환원되는 것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보통 “악법도 법이다”라고 할 때는 배심원이 판결하는 절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으로서의 법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톤>(54c)에서 소크라테스 자신은 “법률이 아니라 사람들한테서 정의롭지 못한 일을 당했다”고 한다.(참조, NEWSTOF, 2019.12.20. https://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29)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당했다는 말은 법의 내용은 물론, 고명섭이 말하는 절차에도 관련한 것이 아니다. 악법 여부는 고사하고, 절차상의 민주정치 발달 여부를 논할 게재가 아닌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불문하고 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악법도 법이다”란 말이 널리 회자되어 온 적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근거 없는 말이라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런 잘못된 상식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전하는 플라톤의 대화편 <크리톤>(50b-51c)에 근거한 것이지만, 정작 거기에는 그런 뜻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법철학(法哲學)》에서 실정법주의를 주장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며,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고 썼고, 이후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한 것으로 와전되었다고 한다.(참조, 위키백과, “악법도 법이다”)]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법적 명령에 불복하여, “철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석방을 받느니 철학을 사명으로 부여한 신에 복종해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변론> 29c-d)고 했으며, 아테네 과두체제의 참주들이 내린 명령에 불복한 전력을 고백하기도 한다.(<변론>, 32c-d) (참조, 뉴스톱, 2019.12.20. https://www.newstof.com)
악법 혹은 민주정치 여부와 무관하게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배심재판관이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이 되고, 또 그 다수 배심재판관은 중우정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두 가지 걸림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은 도출하지 못 한다.
하나는 애초에 소크라테스의 형량이 사형으로 치달은 것은 배심재판관의 뜻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절차상, 형량은 피고와 원고가 직접 결정하여 다투고, 재판관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뿐이다.
고명섭은 소크라테스가 “고소인들이 바랐던 대로 ‘국외 추방’ 형량을 선택함으로써 사형이라는 극단적 형벌을 피할 수도 있었다”고 논평했다. 피고인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제안한 원고 측이 내심으로는 소크라테스가 국외 추방을 선택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원고측의 내심’은 객관적으로 전혀 확인되는 사실(팩트)이 아니다. 원고측은 분명하고 강력하게 소크라테스를 처형할 것을 제안했고, 배심재판관들은 원고측의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도주나 추방이 아니라 독배를 마신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원고가 사형을 요구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그 형량에 대한 재고를 배심재판관에게 요구하고 선처를 구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선처의 요구가 반드시 재판관들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의 선택은 다른 이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의 선택이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 아니며, 거기서 어떤 사회적 행동기준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크리톤>(51d)에서 “자신이 사는 도시의 정치제도와 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산을 들고 원하는 곳으로 떠나면 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그 같은 맥락에 있다.
재판관들이 원고측에 편승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게 된 원인 관련하여, 소크라테스 자신은 다소간 자신의 변론 방식에 기인한 것이라 보았다. 잘못한 것 같으니 살려달라고 애걸하기는커녕, 오히려 청년 교육 관련하여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일생 프리타네이온(행정공관)에서 식사할 만한 공로가 있노라고 호언했고, 이것이 배심재판관으로부터 괘씸죄를 샀다. 고명섭의 인용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판결을 받고 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아마 내가 여러분을 설득할 만한 말이 부족해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 나는 변론할 때도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자유인답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렇게 변론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변론해 목숨을 구하느니 이렇게 변론하다 죽는 쪽을 택합니다.”(<변론>, 38d-e)
이 같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선택은 고명섭이 빗대어 말하고 싶어하는 재판 절차의 민주화 여부와 무관한 것이다.
고명섭의 여섯 번째 오류는 로마 공화정 키케로의 공화정(Republic) 이론을 아테네 플라톤의 국가(politeia) 이론에 빗대어 동일시한 것이다.
고명섭이 이해한 키케로는, 한편으로 “공화국이란 인민 전체의 것”, “특정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소유가 아니라 인민 전체의 소유일 때만 그 나라는 공화국이라고 불린다. 인민이 공화국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민이란 법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유를 통해 결속한 대중의 집단”, “그 공동의 이익은 인민이 자신들이 만든 법의 우산 아래 추구되는 나라”, "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세워 올리는 것", "대중이 모여 대중 자신을 다스리는 보편적 규약을 함께 만듦으로써 법이 탄생한다” 등을 주창했다.
고명섭에 따르면, "이런 키케로 정치사상의 연원은 플라톤 사상에까지 가 닿는다”, “키케로가 ‘국가론’을 쓴 것부터가 플라톤의 ‘국가’를 흉내 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키케로의 공화주의와 플라톤의 국가정체론(politeia)은 사회적 배경 및 제도 구상의 성격이 판이하다. 전자는 귀족공화정이었고, 그 귀족공화정에서 “공화국이란 인민 전체의 것”, “인민이란 법에 대한 동의와 이익의 공유를 통해 결속한 대중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적 원론과 당위를 뜻하는 것일 뿐, 현실에서는 정치, 사회, 경제적 특권을 가진 귀족들이 결정하는 것이 법이 되고, 공공선이란 이름으로 미화되는 것이었다.
반면, 플라톤의 국가(politeia)에서는 기득의 특권이 아니라 재능에 따라 4계층(수호자, 전사, 농부, 장인 [혹은 농부와 장인을 생산담당 계층으로 묶으면 3계층])으로 구분되는 기능적 사회였다. 그중 수호자(철학자, 통치자)와 전사 등 권력을 행사하는 계층이 사유재산을 가지지 못 하고 공유하도록 하는 이상국가이다. 그런 점에서 키케로의 공화국과 플라톤의 국가는 서로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명섭은 나름 고대 아테네의 정치변화를 사법 민주화라는 시각에서 조명하고, 그것을 지금 한국 사회에 질곡을 연출하는 검찰권력의 미래에 빗대어 사법권력의 민주화에 대한 전망을 피력한다. “아테네의 사법 민주화 역사가 보여주는 대로 소수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와 관행은 국민의 저항에 부닥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보편적 법치라는 공화국의 정신은 법 위에서 법을 사유화하는 특권층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방종한 특권 세력으로 지목받고 있는 것이 검찰권력이다. 아테네 시민의 주권적 명령으로 사법권을 박탈당한 아레오파고스의 사례는 이 나라 검찰권력의 미래를 예고한다”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고명섭의 아레오파고스에 대한 이해는 잘못 빗나간 것이다. 아레오파고스는 정치적 평의회가 아니라 살인사건 재판소로서, 민주정치의 발달 여부와 무관하게 공정한 재판소로서 전 지중해에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 고명한 변론가 데모스테네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러하다. 아테네의 민주화는, 고명섭이 이해한 바와 달리, 아레오파고스를 대신하여 민중법정이 들어서는 것으로서의 사법의 민주화가 아니었다.
참고로, 고대 아테네 사법에서는, 민사(사적 사안), 형사(공적 사안)를 가리지 않고, 개인이 기소권을 갖는 것이 지금 영국의 사인소추 제도와 같다. 현재 한국에서 검사가 기소권을 독점하고, 잣대 없는 고무줄 기소를 통해 검찰독재를 연출하고 있으나, 고대 그리스는 아예 시민이 스스로 기소권을 행사했다. 또 다수의 시민(민중)으로 구성되는 재판관은 누구도 직업적 법조인이 아니며, 결정권도 서로 동등하다. 형량은 이들 재판관이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가 각기 제시하고, 그중에서 배심재판관이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다.
고명섭이 염려하는 바, 소수가 권력을 농단하고 끼리끼리 허물을 덮어주려는 기구는 추첨으로 뽑힌 아르콘들로 구성되는 아레오파고스가 아니라, 현재 한국의 국회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에서는 민회가 최고의 결정권을 행사했으나, 현재 국회는 오히려 국민 민중의 결정을 중우로 독단하고, 절대 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 등 담론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통과된 입법이나 탄핵소추가 번번이 대통령 거부권과 헌법재판소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도, 국회에서는 그 같은 제도와 기관을 손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한편으로, 하고한 날 똑같은 빈손 결과로 귀결될 입법, 탄핵을 열심히 진행하겠다고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엉뚱하게도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하겠다고 여론몰이하고 있다. 이쯤 되면 머리를 위에 달고 다니는지, 발밑에 두고 밟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